Friday, February 1, 2013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이 한 장의 사진 시리즈


상장에 얽힌 추억
이 사진은 초등학교 이 학년 때 천안에서 열린 미술실기대회에 참가해 받은 상장들 가운데 하나이다. 유년시절 나의 그림 솜씨를 인증해 주는 증거다. 나는 유독 상상화를 좋아했는데 선생님을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동네 풍경을 그리러 반 친구들과 함께 가던 일이다. 예쁜 여자 담임선생님이 내 손을 꼭 잡고 걸어가셨다. 어린 생각에 그건 일종의 특권이었다. 그때 동산에서 시골 동네를 굽어보며 그린 그림이 교내 사생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어난 사건이었다.
상장을 눈여겨보시라. 명칭이 '종합 기능 실기'인 것이 재미있다. 아마 당시만 하더라도 미술은 기능이라는 인식이 강했나 보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해서 천원군(현재 천안시)이 주최한 미술 실기대회에서 당당히 입선을 해 군수가 상장을 주었다. 상상화부에 참가를 했는데 그림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당시 내가 사는 성환면 수향리에서 군청 소재지인 천안을 가려면 버스를 타야했다. 버스를 타는 일은 언제나 큰 즐거움이었다. 학교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타박타박 걸어서 갔다. 인솔 선생님과 고학년 형들하고 걸어간 기억이 난다.
나에게 천안은 대처였다. 시내에는 4-5층짜리 높은 빌딩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양옥집들이 즐비했다. 시발택시나 버스, 트럭들이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지나갔다. 그런데 내겐 휘발유 타는 그 냄새가 고소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도시 풍경이라든지 차량 따위는 내가 '현대성(modernity)'을 체험한 첫 기억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내게 편리함과 속도로 다가왔다. 빠르고 편리한 것이야말로 모던 문명의 특징이 아닌가.
당시만 하더라도 내가 사는 농촌의 시골마을은 한가롭고 여유가 있었다. 어렸을 적 동네 한 가운데에는 공동우물이 있었다. 우물 앞마당에서는 추석 같은 명절 때면 영락없이 춤판이 벌어지곤 했다. 큰 형 또래의 남자들이 치마저고리로 여장을 하고 춤을 추었다. 그것이 남사당패였는지는 지금도 판단이 잘 안 서지만, 두레패들이 장고라든지 소고, 꽹가리를 치며 법고를 돌렸다. 법고의 끝에 달려있는 흰 창호지가 길게 원을 그리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수리조합 뜰로 가는 길 중간에는 상여집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상여라든지 꽃가마와 같은 동네 공동의 비품들이 들어있었다. 작은 아버지의 달걀귀신 이야기를 자주 들은 탓에 깜깜한 밤이면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곳은 낮에 지나가기에도 왠지 으스스했기 때문에 어쩌다 물고기를 잡으러 수리조합 뜰로 갈 때는 재빨리 뛰어서 갔다.
내가 어렸을 적 우리 집에 한 군인 아저씨가 사랑방에 기거한 적이 있었다. 그 아저씨는 퇴근길에 내게 비과를 사다주곤 했다. 그 아저씨는 나지막한 구릉 너머의 부대에 다녔기 때문에 아저씨가 돌아올 때쯤이면 나는 집 밖에 나가 구릉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아저씨는 구릉 저 멀리서 하나의 점으로 다가왔다. 내가 아저씨를 다른 사람과 쉽게 구분할 수 있었던 까닭은 국방색 옷이 검은 점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저씨의 옷은 그 당시 시골사람이 즐겨 입던 흰옷과 쉽게 구별됐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기다린 것은 아저씨가 아니라 한 줌의 달콤한 비과였던 것 같다.
가끔씩 경부선 철도와 1호선 국도를 바라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했다. 나는 동구 밖에 서서 경부선 철도와 1호선 국도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멀리서 보면 국도 위로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차들이 가로수 사이로 재빨리 지나갔다. 그리고 아주 가끔이었지만 국도 너머로 시커먼 증기기관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느리게 지나가는 모습도 보였다. 어느 날에는 달리는 기관차 지붕 위에 하얗게 사람들이 앉아있던 모습을 본 적도 있다.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50년대 후반, 그 때는 피난시절도 아닌데 왜 사람들이 기관차의 지붕에 앉아 갔는지 나는 지금도 그 게 궁금하다. 아마 추석 무렵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볼 뿐이다.
훗날, 내가 미술대학에 다닐 때 수화 김환기의 <피난열차>를 보며 어렸을 적에 본, 흰 옷 입은 사람들이 하얗게 붙어있던 그 증기기관차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장면은 나의 기억에 잊지 못할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어렸을 적에 동네 아주머니들은 하얀 적삼 밑으로 가슴을 드러내고 다녔다. 큰 젖도 있었고 작은 젖도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동네 아저씨들도 눈여겨보는 것 같지 않았다. 재작년에 행위예술가 문재선이 주관하는 [Pan Asia] 퍼포먼스 페스티벌에서 왕치라는 예명으로 퍼포먼스를 하면서 나는 넥타이를 한 아름 들고 나와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는 어렸을 때 본 여자들 젖이 수십 개는 될 것이라며 익살을 떨었다.
그 무렵 시골동네에는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설극장이 자주 들어왔다. 어느 날 확성기에서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 같은 노래 소리가 들리면 가설극장이 들어왔다는 신호였다. 그러면 동네 앞 수리조합 뜰에서 미역을 감던 우리는 기쁜 마음에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가설극장이 들어선 학교 쪽으로 냅다 달렸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 '오인의 해병', '마부' 등등을 본 기억이 난다. 장동휘, 최무룡, 황해는 아이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장동이, 최무령’ 하고 배우들 이름을 친구 부르듯 하며 아이들은 미역을 감으러 가는 도중에도 영화 본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초등학교 때에는 자연이 곧 교과서였다. 우리는 들판을 쏘다니며 여름에는 참외서리를 하거나 수박으로 수구(水球)를 하면서 냇물에서 헤엄을 치며 놀았다. 헤엄을 치다 싫증이 나면 물고기를 잡았다. 안양리 아이들은 안성천이 가까웠기 때문에 물고기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물고기는 종류에 따라 잡는 법이 다 달랐다. 모래무지, 미꾸라지, 송사리, 메기, 가물치, 불거지, 뱀장어 등등 고기잡이는 모두 물고기의 생리를 이용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불거지는 몸에서 무지개 빛이 났는데, 날렵하게 생긴 그 놈은 성질이 급해 잡아놓으면 금방 죽었다. 나는 알록달록한 색깔 때문에 그 놈을 유독 좋아했다. 그 외에도 들판에 아이들의 놀이는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봄에는 개구리를 잡아 즉석에서 구워먹었고, 여름에는 천렵과 함께 쇠풀을 뜯기며 메뚜기를 잡았다. 긴 강아지풀에 메뚜기를 꿰어 집에 돌아와 짚불에 구워먹었다. 가을에는 콩서리가 그만이었는데 이 모두는 아이들의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한 일종의 건강식이었다.
깜깜한 여름날 밤, 옥수수 밭에서 풍뎅이를 잡거나 건전지를 들고 뒷동산 숲 속에 들어가 참나무에 붙은 장수하늘소와 사슴벌레를 잡는 일도 재미있었다. 학교에서 곤충채집을 여름 방학 숙제로 내 주었기 때문에 그것은 의무사항이기도 했다. 장수하늘소나 사슴벌레는 참나무에 잘 서식했다. 깜깜한 밤중에 참나무의 굵은 나무둥치 위로 건전지 불을 비추면 그놈들은 꼼짝 않고 쥐 죽은 듯이 있었다. 우리는 그놈들을 잡아다 싸움을 붙이곤 했다.
뱁새 길들이기는 또 어떤가. 참새나 물총새, 종달새는 길들이기가 쉽지 않았지만, 뱁새는 쉬웠다. 그놈은 달아나지도 않았다. 검지 두 개를 번갈아 가며 움직이면 뱁새는 재빠르게 두 발을 바꿔 손가락 위로 기어올랐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우리 집 처마 밑에는 참새집이 있었다. 초가는 서까래 사이에 진흙을 채워 넣은 뒤 이엉을 올렸는데, 오래된 처마 밑의 진흙더미에는 자연이 구멍이 생겼다. 거기에 참새들은 알을 낳고 새끼를 깠다. 참새가 먹이를 입에 물고 구멍 속을 드나들면 새끼가 있다는 신호였다.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사다리 위로 올라가 구멍 속에 손을 넣었다. 그때 손에 잡힌 따뜻하고 물컹한 새끼 참새의 촉감이라니!
처마에서 고드름이 녹아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한 겨울의 대낮에는 아이들이 우리 집 마당에 모여 자치기를 했다. 마당에 참하게 생긴 고구마 모양으로 구멍을 파고 홈 앞쪽에 양끝을 뾰족하게 깍은 새끼 막대기를 걸쳐놓고 운동회에서 릴레이 계주할 때 쓰는 바통 모양의 나무로 쳐서 멀리 쳐내는 것이 자치기다. 그것은 야구와 비슷한 규칙을 가진 경기였다. 자치기에는 여러 놀이 방법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것은 멀리 달리기였다. 그것은 새끼 막대기를 쳐서 손에 받아 무한정 달리는 놀이였다. 상대편이 좇아가 몸에 터치를 하면 지는 경기였다. 그러나 달리는 아이가 새끼 막대기를 놓으면 달린 거리를 재야했기 때문에 발 빠른 아이가 최고로 인기가 좋았다. 자치기가 시들해지면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서 점심을 먹고 만화를 봤다. 시골의 점심은 김장김치나 신건지(무우를 소금에 절였다 물에 씻어먹는 것)에 찐 고구마를 먹거나 시큼한 김치에 수제비를 끓인 것, 혹은 김치 볶음밥이 인기가 좋았다. 우리 집은 누나들이 많았기 때문에 다양한 겨울철 음식이 많았다. 어머니는 안방의 벽장 속에 곶감, 엿, 뻥튀기에 조청을 발라 쌀 강냉이를 입힌 산자 등을 숨겨 놓고 조금씩 꺼내 주셨다. 그러나 나는 용케도 숨긴 곳을 알아내 풀방구리 쥐 드나들 듯 야금야금 꺼내먹었다.
점심을 때우고 나면 만화를 봤다. 긴 겨울방학은 만화책을 읽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박부성의 <고향눈>, 김종래의 <엄마 찾아 3만 리>, 추동성(고우영)의 <짱구박사>, 김성환의 <삼국지>, 김경언의 <ㄱ검사와 읍칠성이>, 김산호의 <라이파이> 등등이 내가 초등학교 때 본 만화들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박부성의 <고향눈>을 가장 좋아했다. 만화 속의 진식이는 발명왕이었다. 이 만화는 권선징악적인 내용이었는데, 진식이의 상대편인 심통이는 나쁜 짓만 골라서 했다. 몇 해 전, 어떤 이야기 끝에 이 <고향눈>이야기가 나오자 동양화가 박 아무개 교수가 말하길, 동양화의 원로화가인 J씨가 바로 박부성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뻐 바로 전화를 했는데 정작 본인은 의외로 강하게 부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념 문제와 관련된 어떤 사연이 숨겨 있지 않나 짐작만 할 뿐이다. 나는 어린 나의 상상력을 북돋아주고 꿈을 심어준 이 만화를 언젠가 꼭 다시 보고 싶었는데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한국만화 100년전]에도 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초등학교 삼학년 무렵, 나는 <고향눈>의 진식이가 한 대로 겨울에 눈이 많이 쌓이면 벽돌 찍는 틀로 눈 벽돌을 만들어 성을 쌓는 일에 몰두했다. 동네 아이들과 편을 짜서 전쟁놀이를 하는데 벽돌은 생각보다 작았고 잘 찍히지도 않았다. 이때 우리들이 성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던 동네 형이 "사과 궤짝으로 만들어야지."라고 말했으나, 시골에서 사과궤짝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성 쌓기는 포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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